국제자원활동 보고서

하늘색 사각형 방에 팔구(효정, Atti) 코 고는 소리, 은정이(Anju) 숨소리가 슬근슬근 울려 퍼진다. 밤 11시 54분. 팔구는 이층 침대 위에서, 은정이는 이층 침대 아래에서, 그리고 나는 타일 바닥에 매트를 깔고 누웠다. (1층-2층-바닥, 한 주씩 자리를 바꿔가며 잠을 자고 있다.) 벽을 따라 캐리어가 누워 있고, 물건들을 정리해둔 정리함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서 있다. 전기가 들어온 날이라 희미한 전구가 켜져 있고, 비상하는 나방 몇 마리와 낙하한 모기 몇 마리가 보인다. 나무 창문은 닫아버렸고, 방문을 조금 열어 모기향을 피워 두었다. 여치 같은 것이 한 마리 들어와서, 죽여야 할 지 살려야 할 지, 지금 고민 중이다. 우리 사메팀 숙소 여자 방의 풍경이다.


벽 하나 너머로 오빠들 방이 있는데, 벽이 얇아 이쪽 방에서 무슨 말을 하면 옆방까지 들린다. 인간 홈매트라 불리는 두호 오빠는 시원한 바닥에 매트를 깔고 자고 있을 것이고, 두보 오빠는 침대에 기타를 안고 누웠을 것이다. 한쪽 벽에는 얼마 전 줄리아운 아저씨와 함께 만든 목재 선반이 있다. 가져온 책이며 빌린 책이며를 일렬로 정돈해 두었다. 역시나 하늘색 사각형 방. 사메팀 숙소 남자 방의 풍경이다.


방문을 조금 열면 피스커피 프로젝트의 산지인 사메(Same)답게, 커피 포대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방 바로 앞에 수출될 커피 포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커피 포대 위에 올라가 책도 읽고, 앉아 있기도 하고, 기타를 치기도 하고, 아침으로 먹다 남은 빵을 뜯어 먹기도 한다. 냄새를 금방금방 잘 흡수해버리는 커피콩의 특성상, 커피 포대 위에 올라가 있을 때에는 절대 방귀를 뀌면 안 된다는 금기도 있다.


심(두보오빠), 누누(두호오빠), 아띠(효정), 안주(은정), 아반(연지). 우리 사메 5인방의 일상은 대충 다음과 같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쫑쫑쫑쫑 3, 40분 정도 걸어 사메의 가브라키 초등학교에 간다. 영어 수업과 미술 수업 두 가지를 진행하고 있다. 수요일에는 점심을 먹고 짐을 꾸려 다 같이 저기 높고 추운 마을, 로뚜뚜로 간다. 쪼리를 벗고 운동화를 신고, 양말도 꼭꼭 챙겨신어 3시간 정도를 걸어 도착하면,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로뚜뚜의 초등학교에서 똑같은 수업을 진행한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 다시 사메로 내려와, 일요일은 황금 휴일을 보내는 것. 이것이 간략한 사메팀의 한 주 스케치이다. :)


아침은 빵과 튀김류. 동티모르에서는 어딜 가나 아침은 간단하게 구운 빵과 커피로 밥을 대신하는데, 어느 마을을 가나 동네 어디엔 빵을 구워 파는 집이 한 두 군데씩 있다. 아침 일찍부터 바나나 튀김이나 밀가루 야채 전병 같은 튀김을 튀겨 플라스틱 통에 담아 팔러 다니는 아이들도 만날 수 있고, 쫀득쫀득한 도넛(불량식품처럼 생겼다.)을 파는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며 도넛을 살 수도 있다. 커피나 차를 한 잔씩 손에 들고, 우걱우걱 아침을 먹는다. 거울을 보는 날이 더 많은지, 세수를 하는 날이 더 많은지 갸우뚱 할 정도로, 아침부터 세수를 하는 일은 잘 없다. 땀을 많이 흘린 날의 개운한 샤워로 족하다. 물사정이 좋지 않아, 빨래를 하는 날엔 집을 조금 나서면, 길가에 흐르는 맑은 물이 있다. 그 작은 강에서 빨래도 하고, 씻기도 한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우리가 빨래를 하러 가면, 아이들은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다들 구경을 하고, 우리는 머쓱해져서 히히 웃어버린다.


동네에서 제법 큰 시장까지는 걸어서 30여 분. 점심이나 저녁을 위해 식사 재료를 사러, 대부분 매번 시장을 왕복한다. 양배추, 가지, 참치캔, 고사리와 비슷한 가브라, 너무너무 비싼 양파(주먹보다 작은 양파 두 개에 천 원이나 한다!), 당근, 감자(요것도 비싼 재료에 속한다.), 마늘, 설탕 등을 사다 나른다. 냉장고가 없는 사메에서는 매 끼니마다 필요한 재료를 필요한 만큼 사고, 다시 필요해질 때 사곤 한다. 가지가 먹고 싶을 때 가지가 없으면, 시장에 다시 가지가 나오는 날, 사 먹으면 된다!


요리는 가사를 담당하고 계시는 숙소의 줄리아운 아저씨와 함께 준비한다. 보통은 채소들을 썰어서, 기름을 두른 넓적한 냄비에 마구 볶아 소금 간을 해 익히면 끝이다. 오늘은 당근-양배추, 내일은 감자-양배추, 모레는 참치-양배추, 이런 식이다. 우리나라 라면과 비슷하게, ‘슈퍼미’라 불리는 인도네시아 산 인스턴트 면은 빠지는 날이 없다. 볶아서도 먹고 국물 음식으로도 먹고, 꼬들꼬들하게 익혀서도 먹고 푹 삶아서도 먹는다. 가끔씩 주말이면 시간을 더 들여서 우리끼리 고구마튀김도 해먹고, 야채 튀김도 해먹고, 고추장을 꺼내 라볶이처럼 빨간 볶음 반찬을 해먹기도 한다.


동티모르에는 (우리의 상상과는 다르게) 과일이 풍부하지 않아서, 배가 터지게 바나나를 먹는다거나, 훌라훌라 춤을 추며 망고를 먹는다거나 하진 않지만, 시장에서 처음 보는 과일류를 발견하면, 한 번씩 시식회를 가진다. 아직까지 꾸준히 즐겨먹고 있는 훌륭한 과일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래도 과일을 먹으면 늘 기분 좋게 웃는다. 가끔 지쳐 힘들 때면, 화교 상점에 달려가 ‘코카콜라요!’를 외치면 되고. 익숙한 청량감에 또 깔깔깔 웃으며 일상에 활력을 불어 넣는 거다.


요즘은 커피 수출 직전 기간이라, 한창 커피콩 고르는 작업이 한창이다. 굉장히 넓은 사메 숙소의 현관 베란다에는, 아침부터 해질녘 무렵까지 커피를 고르는 아주머니들로 북적북적하다. 커피 포대는 여기저기 쌓여져 있고, 사람이 다닐 길 한 줄만 남겨놓고는 모든 곳에 아주머니들이 진을 치고 앉아 종일 커피콩을 고른다. 못생긴 놈들을 골라내는 거다. 색깔이 예쁜 푸른빛이어야 하는데, 색깔이 좀 못났거나 모양이 많이 찌그러졌거나, 구멍이 송송 뚫린 놈들은 탈락이다. 가차 없이 분류되어 버리는데, 이런 놈들만 골라내는 아주머니들의 손놀림이 여느 달인 못지않다. 커피 수출은 임박해져왔는데, 이 커피 고르는 작업의 일손이 부족해 우리 팀 단원들도 이 작업을 도와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왁자지껄한 이야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넘치는 아주머니들의 공간에 구석진 자릴 골라 앉아 한 번씩 그 작업을 도와드려 본다. 느릿느릿한 손놀림으로, 작은 커피콩들이 끝도 없이 누워있는 바구니 속을 한참 바라보다가 몇 알을 집어내고, 또 몇 알을 집어낸다. 속도가 좀 붙었다 싶다가도, 힐끔, 옆에 계신 아주머니를 한 번 쳐다보면 다시 나는 신참이다. 그렇게 며칠째, 나날이 나날이, 커피콩을 고르는 작업은 일상의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오전 오후 내내 골라낸 커피 콩을 다시 포대에 담아, 저녁엔 포대마다 무게를 단다. 밤까지 그런 작업들이 이어지면서, 요즘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날에도 발전기를 돌린다. 덕분에 우리는 이런 저런 전기제품들을 충전할 수 있지만, 평소에는 3일에 한 번, 전기를 만날 수 없는 날이 있다. 해가 지기 전까지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가끔은) 씻어야 한다. 해가 지면, 촛농이 높게 솟은 촛농받침을 가지고 실내 여기저기에 촛불을 하나 둘 씩 밝혀 둔다. 방에도 하나, 거실에도 하나, 부엌에도 하나. 화장실에는 전용 랜턴이 비치되어 있고, 방에도 하나씩 랜턴을 가지고 있다. 새벽에 갑자기 화장실을 가야 할 때나, 그래도 끝까지 어둠 속에서 책을 읽을 때, 랜턴은 고약하지만 고마운 태양이 된다. 처음엔 너무 어두워서 켜진 불을 가지고도 ‘당최불만족’이었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이 정도 어둠과 이 정도 밝기에 익숙해진 모두는, 갑자기 전기가 나가버리거나, 또 아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날에도, 누구 하나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하지 않고 태연하다. 전기가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탄성을 지르며 책도 읽고, 노트북으로 음악을 듣거나 영화도 본다. (인터넷은 안 되지만.) 공연히 전기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게 되고, 또 가끔은 공연히 시력이 나빠졌을 거라며 시력 타령을 한다.


우리의 일상 스케치는 이런 모습이다. 낮에 창문을 열면 조그마한 동네 꼬마 녀석들과 닭, 염소, 개가 마악 뛰어다니며 놀고 있고, 뒷문으로 나가면 키가 큰 코코넛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앞마당의 코코넛 나무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아저씨들이 가끔은 무시무시한 칼을 차고 나무 위로 올라가 코코넛을 따주기도 한다. 많은 것에 익숙해졌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작은 기쁨과 설렘이 여전히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고, 모든 일상을 담담하게 보내고 있지만, 크고 작은 걱정과 불안, 긴장도 뾰루지처럼 올라왔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기도 한다.


낭만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우리에게도 그저 일상일 뿐인 일상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우리는 이 일상과 두 달 째 만나고 있다. 그래도 간간이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쏟아질 것처럼 너무너무 예쁘고, 자고 있는 내 얼굴로 떨어지는 날벌레들과 온몸을 물어뜯는 제목 모를 벌레들은, 감상에 젖지 말고 계속 안테나를 곤두세워보라고 나에게 충고를 남긴다. 낯선 일상을 익숙함으로 만들면서,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우리 주변의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파장들과, 우리가 그려야 할 파장들에 대해서 말이다.


(전화하면 모두가 묻는 말인데) 한국과 시차가 하나도 나지 않는 여기 동티모르 사메에서, 커다란 달을 본다. 여전히 코고는 소리, 숨소리가 들리고, 개가 짖는 소리도 들린다. 일곱시가 조금 못된 시간에 기상을 해서, 일곱시 20분에는 집을 나설 것이다. 데일리 사메.


2008. 10. 20 새벽 1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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