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자원활동 보고서

# 2. 6 5 ~ 6 12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여행길.

 

5월 말까지 계획되어 있던 놀이터, 데이케어센터 일까지 모두 끝낸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프로젝트가 끝나던 날 했던 세레모니를 보고 감동 받으신 필리핀Y 사무총장님께서도 마침 일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안 좋은 일도 있었으니 휴식 겸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여행을 떠나면 좋겠다.”는 존경스러운 말씀을 하셨다. 이리하여 우리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하기 위한 길을 떠났다.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며 가벼운 발걸음 닫는대로갔던 여행은 아니었다.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며 길을 찾아 헤메는 모험을 기대했으나 다른 라온아띠들도 그렇겠지만.. 극심한 보호를 받는 우리들이 아닌가. 6 5, 우리는 밴을 빌려 새우자세로 잠을 청하며 장장 14시간을 달려 마닐라에 도착했다. 예전에 혼자 여행을 할 때도 숙박비 아끼겠다고 밤에 버스로 이동하곤 했었는데 해가 뜨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때문에 이번엔 눈 부릅뜨고 벼르고 벼르다가 찬란한 일출을 목격했다. 나는 차 안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솟아 오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태양이, 어스름했던 풍광을 오렌지 빛으로 서서히 물들이며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경이롭기 이를 데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중 단연 첫 번째였다. 새벽을 맞은 어느 이국의 풍경이란그저 신선할 뿐.

 

1. 바기오, 이모님과 호돌이.

 

5일 오후 마닐라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린 YMCA호텔에서 1박을 한 후 6일 아침에 바기오로 향했다. 차 안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을 구경하고, 핫초코를 마시며 과자들을 주워먹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잠 자는 옆 친구도 구경하자니 드디어 차가 산을 타기 시작했다. 바기오로 가는 길은 끊임없는 오르막길이었다. 에어컨도 안 나와 창문을 열고 안개 낀 풍경과 산 중턱에 집이 즐비한 광경들을 보는데.. 그 순간이 너무 생소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덥디 더운 필리핀이란 나라엔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높은 지대.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능가하는 그 격하고 높은 커브. 안개마저 서린 풍경의 신비함은 가면 갈수록 오묘해졌다. 

   

 

반나절을 달려 도착한 바기오는 북적거렸다. 게다가 생소하게도 날씨가 추웠다.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있던 나는 정말 오랜만에 발이 시렵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좋았던 점은 레가스피엔 하나도 없는 한국 식당이 수없이 많았다는 점. 이미 맥주 한 잔을 걸친 우리의 눈에 들어 온 것은 한국 음식점 이모네우리 이모님들은 왜 이렇게 전 세계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계시는지한 번 방문해드려 그간 그리웠던 이모의 음식솜씨와 천 페소를 바꿨다-_-;

 

  

 

바기오에서의 여행 일정은 무척이나 빡셌다;;; 조금 더 여유롭게 감상하고 싶었으나 패키지 상품 통해 온 단체 관광객 마냥 스탭으로부터 빨리 차로 돌아오라는 문자가 연신 왔다. 딸기 농장, 필리핀 식 중국 절, 공원 등등을 초단시간 내에 둘러보았다. 다른 지역과 사뭇 다른 기온 덕에 바기오엔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유명하다고 했으나우린 딸기 농장에 가서 리치만 엄청 먹고 왔다. 딸기는 자라지도 않은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신 낄낄대며 맑고 밝은 그 풍경과 함께 어우러졌다. 도심은 여전히 매연에 찌들어 있었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푸르른 녹음을 마주할 수 있는 축복받은 환경이었다. 요즘엔 개발 붐이 일어 나무들을 잘라낸다고 어른들은 개탄하셨지만.   

      

 

  

 

이 곳 저 곳, 유명한 곳을 모두 다 둘러보고 배가 고파졌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구수한 식당을 발견한다. 이름하여 호돌이 식당’.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고씽. 순두부 찌개를 비롯해 먹고 싶어 죽을뻔했던 한국 음식들을 다 시키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먹었다. 나라에 대한 애국심은 제로에 가깝지만 한국 음식이라면 내 밤새 찬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난 이렇게 3개월만에 처음 맛보는 고향의 맛에 감탄하였으나 오리지널은 아니라는 미식가 강세민씨의 품평회는 시끄럽게 계속 되었다. 그럼 드시지 마시던가요-_-^

 

바기오에서의 마지막 날, 역시나 빡센 여행이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200개가 넘는 계단 위의 성당까지 올라가란다. 그래도 뭐, 우린 즐겁다^^ 성당에서 정성스레 초를 꼽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며 다소 경건한 마음으로 바기오의 아침을 만끽했다. 그림 그리는 남자 김희곤 단원은 그 새를 놓치지 않고 성당을 스케치하는 예술가 정신을 발휘해 우리를 감탄하게 했다. 부러운 재주다.

여행책자를 보며 바기오에 가면 가장 들르고 싶었던 예술가 마을 탐아완 빌리지를 가게 되었다. 탐아완 빌리지는 필리핀 원주민 중 한 부족인 이푸가오족의 전통 가옥이 있고 그들의 예술과 문화를 보존하고자 조성한, 일종의 관광지이다. 불임인 부부들이 하루를 묵으면 아이가 생긴다는 오두막 집도 군데군데 있었다. 그냥 자기만 해도 아이가 저절로 생기냐고 다같이 캐물었지만 가이드를 해주었던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I don’t know”만 연발했다^^ 재밌다. 탐아완이 너무너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 다른 나라의, 혹은 다른 지역의 관광지와는 다르게 정제되지 않은 모습 때문이었다. 보통의 관광지라면(특히 이렇게 산 속에 있는 곳의 경우) 방향을 안내하는 화살표 천지라 관광의 자유와 시선의 자유를 빼앗기 일쑤인데 우리는 심지어 오지 탐사를 했다. 올라가기 전 기본적인 도형으로만 그려진 지도 한 장 주고 다녀오시오이런 정도라 알아서 돌아와야만 하는 구조였다. 길도 말끔히 정돈되어 있지 않아 늘어진 가지를 헤치고 올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지도에는 길이 있는데 실제로 보니 덤불이었던 것이다-_-;; 그래, 이런 게 우리 스타일의 여행이지. 진흙 바닥에 넘어지기도 하며 양평에서의 훈련이 이렇데 도움이 되냐며 또 깔깔대었다. 또 가고 싶을 뿐이다ㅠ

점심을 먹은 후 들른 곳은 캠프 존 헤이와 식물원이었다. 말도 안되게 쭉쭉 뻗은 나무들 틈새에서 뒹굴고 뛰고 걷고 웃고를 반복했다. 잔디밭에서 동그랗게 누워 사진을 찍으며, 괜히 도망가는 고양이를 쫓아 뛰던 강세민 단원을 보며, 온 천지가 녹색이던 그 절경을 보며 우린 참 행복했었던 것 같다. 즐겁고 유쾌했다. 여행의 묘미란, 이렇게 별 대단한 걸 보지 않아도 함께 하는 사람들 덕분에 느끼는 행복이다.

 

  

그 날 밤, 전 날 먹은 한국 음식으로는 성에 안 차 세민오빠와 나는 결국, 밤 중에 먹어야 더 맛있다는 라면을 먹기 위해 다시 호돌이로 향했다. 문을 닫는 와중에도 굳이굳이 라면을 사서 봉지에 끓는 물을 넣고 뽀글이를 만들었다. 민폐라면서도 우린 연신.. “,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뜨거운 물 좀…” “.. 물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짤 것 같은데..;;”…………. 창피하다. 주인 아주머니께선 매일 보시는 한국인인 우리를 쫓아내시지 않은 데엔 강세민 단원의 거지꼴이 한 몫 했으리라 믿는다. 라면 봉지를 움켜쥐고 숙소로 돌아갔으나 문은 굳게 잠기고일단 우리는 그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 날, 바기오 시내를 내려다보며 먹은 그 너구리 한 마리.. 조금 오버해서, 태어나서 먹은 너구리 중 가장 맛있었다. 안 익으면 어떤가, 비행기를 타야지만 갈 수 있는 어느 타국의 도시에서 내 옹색한 자취 생활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너구리 한 마리를 몰고 가는데 어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별이 극악스럽게 초롱거리던 추운 밤, 쭈그리고 앉아 너구리를 먹으며 몸을 데우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다. 아마 세민오빠와 나는 다시마를 먹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를 놓고 언쟁을 했었지. 차마 달라고는 못하고 계속 곁눈질을 하던 나에게 칼국수 한 젓가락 안 줬으면서 다시마를 안 먹는다며 구박-_-..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날의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야말로 여행이 창출해내는 가장 큰 이윤이 아닐까. (이런 자본주의적 감상-_-^)   

 

김성주 보고싶은 알 !! 오랜만에 접하는 바기오 소식이 반갑네요 :)
2009.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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