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자원활동 보고서



Esther

 Esther.는 미친 여자다. Esther.는 개념이 없다. Esther.는 한시도 우릴 가만 두지 않는다. Esther.는 정말 말이 많다. Esther.는 폭력적이다. Esther.는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한다. Esther.는 많이 먹는다. Esther.는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는다. Esther.는 내 절친이다.
 Esther.는 deaf다.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다는 말은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생각해 볼, 또 상상해 볼 기회도 없었던 일들을 경험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들을 꿈꾸며 살 마음을 먹게 됐다. 말레이시아에 오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내게 일어났고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조용한 세계의 평범함
   이곳에서 deaf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과 친구가 되지 못했더라면. deaf들의 절대 조용하지 않은 이 세계에 들어와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 그들의 특별함을, 동시에 그들의 평범함을 알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평생 그들을 들리지 않는 사람들,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장애를 가져 불편한 사람들로 분류하며 나와는 다른 이들, 나와 섞일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그 존재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 무섭기도 하고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사실 처음 deaf들을 만났을 때는 두려운 마음이 컸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수화를 막연하게 바라보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냥 조심스럽기만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는 항상 그렇게 어렵기 마련이지만 deaf들을 만났을 때는 처음 만나 어색한데다 그 어색함을 풀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힘들다보니 특히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 안절부절 못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Esther, Sandy, Jasmin 이렇게 가까운 deaf 친구들이 생겨 수화도 배우고 매일 같이 밥도 먹고 여기저기 함께 다니다보니 그런 어색함이 사라진 건 물론 과장된 연기며 표정을 배워 표현이 풍부해지고 가끔 생기는 곤란한 상황들도 즐기게 됐다. 서로 연기자 다 됐다며 쓰러지게 웃는 우리들. 이런 우리 모습, 내 모습이 새롭고 신기하고, 또 좋다.

   내 친구 Esther
   이제 내게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 무엇이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않고 내 친구 Esther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Esther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PMY deaf center 동료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내가 만들었던 ‘DEAF'의 개념을 모조리 깨준 한마디로 ’깨는‘ 여자다. KL에 있었던 고작 한 달의 시간동안 우리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되었고 창피한 얘기, 더러운 얘기, 야한 얘기까지 모두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수화로 대화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껑충껑충 뛰며 연기를 하기도 하고 방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하면서 서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그냥 친구가 된 것이 아니라 노력하며 친구가 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더 좋아하게 됐고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생각한다. 우리는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을 불편함이 아닌 또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관계도 재미있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나는 Esther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고 또 많은 것을 배웠다. Esther는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를 KL 구석구석까지 데려가주고 항상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소개해주고, 무엇보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언어인 수화로 우리는 그 어떤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소통, 대화는 우리만의 방식이라 더 특별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해 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나를 찾는 일
   이런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상황, 새로운 친구, 그리고 새로운 내 자신. 이 모두는 내게 정말 소중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은 꿈을 가진 내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이자 공부이다. 나는 남들이 다 알지만 동시에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전엔 언제나 그렇듯, 아직은 내가 아는 세상이 거기서 거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하는 답답함을 갖고 있었다. 학교생활에 쫓기고 동아리에 쫓기고 친구들에게 쫓기고 열등감에 쫓기고. 그렇게 쫓기듯 살며 완전히 새로운 것에 시선을 두고 있기란 그저 꿈같은 일이였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곳, 상상하기도 버거운 곳으로 나를 내몰고 싶었고 그곳에서 내가 아는 세상을 벗어난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리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의 환경 자체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말레이시아라는 나라 자체보다 이 익숙한 환경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deaf들을 통해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고 그 속에 있는 내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또 상상하게 됐다.
 처음엔 청각장애인들은. 그들은. 불편하겠지, 답답하겠지, 그야말로 조용하겠지, 참 내 멋대로 많은 상상을 했다. 말레이시아를 오게 되고 deaf들을 만나게 된다는 걸 알면서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놓고 구분 지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deaf들에 대한 다큐를 찍었다면 그 다큐는 정말 그런 부분만을 보여주는 재미없는 영상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 영상에는 자기 생각이 담기기 마련이니깐. 하지만 그런 내 부실한 상상을 완전히 깨주듯, 내가 여기서 만난 deaf들 중 얌전한 친구는 단 한명도 없다. 오히려 모두들 너무 정신이 없어 내 기를 빼앗길 정도다. 이제 내가 찍을 다큐에는 말 한마디 없이도, 쿵쾅대는 음악 없이도 시끄러운 deaf들의 모습이 담기게 될 것이다. 조용하지만 시끄러운. 소리 없이 신나는. 이런 경험을 내가 하게 될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끔 deaf 친구들과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나중에 다시 돌려보면 그때의 우리가 소리도 내지 않고 저렇게 미친 듯이 떠들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우습다. 이제 들리지 않는 것, 소리 내지 않고 대화하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내가 배운 세가지?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남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항상 재밌고 신나는 일을 했고 일이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없다. 그래서 처음엔 우리가 봉사활동을 하러 온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꿈꾸게 하고 그 꿈속에서 넓은 세상을 보게 해준다는 생각을 한다. 가서 배워오기만 하라던 말이 지금은 이해가 간다. deaf들을 통해 남보다 어려운 점이 하나 더 있다고 해서 우울할거란 단순한 상상은 하지도 말 것이며, 들리지 않는다고 정말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말하지 못한다고 조용한 건 절-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이 세 가지는 분명히 배웠다.
   나는 이제 정신이 반쯤 나간 말레이시아 deaf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항상 Esther를 미친 여자라고 부른다. 그럼 Esther는 대답한다. “너희도 정상은 아니거든~”


손민주 ㅎㅎㅎ 글로만 봐두 즐거움이 묻어나네요 ㅎㅎ 돌아오면 많은 얘기 부탁해요^^
2011.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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