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자원활동 보고서




물을 삼킨 아순시온




요즘 아순시온에서는 햇빛이 쨍쨍한 날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2주 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아순시온 이곳 저곳에서 홍수의 피해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아순시온 YMCA 사무총장님께서 말씀하시던 스위밍풀 (swimming pool)이 바로 이 모습을 가르키는 말이었던 걸까.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야 말았다.




물에 잠겨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 곳은 원래 차가 다니는 도로이다.



논이 물에 다 잠겨 야자수만 보이는 상태.




처음, 홍수가 곧 날꺼라는 현지인의 말에도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마을 빽빽이 가득 서있는 야자수들과 다양한 열대 과일 나무들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배운 내용을 더듬어보면 나무 뿌리가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나무를 많이 심으면 홍수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나무들이 이렇게나 많은 데 홍수가 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야자수가 물을 한껏 머금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비가 그 용량을 초과했던 걸까, 기어이 비는 온 마을과 집, 학교, 논들을 삼키고야 말았다.



다행히도 우리 집은 고도가 낮지 않아 잠기지 않았다. 다만, 화장실 변기 수위가 조금, 아니 많이 높아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변기가 막힌 걸로 생각해 누가 규칙을 어기고 변기에 휴지를 넣었냐며 소리쳤지만 원인은 홍수였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나름 견디기 힘든 재해가 우리 집에도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장실 전구를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였다. 차라리 캄캄한 상태로 안 보는 게 나았다.



이렇게 작은 일로도 홍수의 피해를 체감하고 있었는데,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밖을 나와 마을을 보니 가관이다. 쭉 뻗은 도로 길 옆에 내리막길을 따라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길보다 고도가 낮은 탓에 피해가 크다. Tagum city로 차를 타고 가는 길에 "Swimming pool!" 이라고 하시며 껄껄 웃으시는 따따이의 말에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옆은 온통 강이었다. 논은 벼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잠겨있었고, 반대편 도로에 있는 학교는 지붕만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들은 다행히 1층은 푹 잠겼지만, 2층은 살아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살림살이와 화분 등을 모두 2층에 올려놓고 있었다.






1층은 비어있고 2층에서 생활하는 필리핀 주거형태.





이전에 초영 언니가 필리핀의 가옥구조에 대해서 쓴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필리핀의 전통 가옥구조는 나무로 만들어진 2층 집인데 1층은 지지대로만 구성되고 속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생활은 대부분 2층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면 되는데 이는 홍수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논밭에 관개시설이 미약하고 도로 전반에 배수시설이 잘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이러한 가옥 구조는 필수적이다.




한국에 있는 우리 집은 아파트이고 거기다 20층이다. 그리고 광주에서 홍수가 크게 난 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홍수피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낱 작은 빗방울일 뿐인데 왜 그게 홍수가 날까. 그러나 이 곳에서 생생히 눈앞에서 목격한 홍수는 한낱 작은 빗방울, 훨씬 그 이상이었다. 인근 까팔롱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에선 갑자기 내린 비에 초등학생 세 명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물에 휩쓸려버리고 말았다. 도로인지 강인지 경계선이 구별이 안가 차들이 타이어까지 올라오는 물살을 조심스레 헤치며 간다.






오토바이의 절반이 물에 잠겨있다.





사정이 이정도이니 홍수가 나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아도 학교는 자연스레 쉬게 되고(학교가 물에 잠겼으므로 당연한 거겠지만), 갑작스런 물난리에 우리에 있던 돼지들은 도로 가장자리에 배를 깔고 쭉 늘어서있다. 미처 물에 잠긴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구조하는 구조대 차가 보이는 가운데 이상한 점 한 가지를 발견했다.



홍수난 걸 구경시켜주겠다며 우릴 차에 태우고 여기저기 드라이브 하고 있는 STAFF,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구조대차를 보고 멈춰서 창문을 열고 시시한 농담을 하는 또 다른 STAFF, 그리고 빨리 사람들 구조하러 가야될 것 같은데 농담을 다 받아주며 웃고 있던 구조대원, Swimming pool 이라며 껄껄 웃으며 swim-suit를 준비하라던 따따이. 마당에 있던 살림살이들을 2층에 옮기고 있는 진짜 홍수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길가에 팔자 좋게 늘어져있는 분홍빛 속살이 눈부신 돼지들까지 누구하나 얼굴에 근심 하나 드리워져 있지 않다. 가만 보니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건 우리 셋뿐인 것 같다.





세상 모르고 쿨쿨 단잠을 취하고 있는 핑크 돼지




매년 한두 차례씩 홍수가 난다고는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익숙해질 자연재해도 아니고,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해도(사실, 철저해보이지도 않는다) 그때마다 피해는 생길 수 밖에 없는 데 왜 다들 조금도 심각해지지 않는 거야!



얼마 전 필리핀의 역사에 대한 글에서 필리핀은 자원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고 날씨가 온화해서(온화...;;) 사람들 성격도 자연스레 밝고 걱정 없고 낙천적이다 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확실히 한국 사람들에 비해 훨씬 밝고 유머러스 하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가끔은 달달한 말도 잘 하고.



그러나 가끔, 필리피노 들의 대책안서는 낙척전인 마인드에 허허- 기가 찰 때 가 있다. 예를 들면, 상대방을 잔뜩 열받게 해놓고선 “너의 행동 때문에 나 지금 화났어” 라고 말하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It's up to you^^ (그건 너한테 달렸어) 그러니 나한테 화를 내든, 나를 용서하든, 마음대로 해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하는 식이다. 그럴 땐 뚜껑이 확 열리지만, 이번엔 낙천적인 마인드가 이긴 것 같다. 홍수가 날 때마다 안절부절 하늘을 저주하는 모습보다, 비가 와서 우리 집 1층이 잠기면 2층에 가있지 뭐, 가축 우리가 잠기면 도로가에 내놓지 뭐, 학교가 잠겼으면 하루 쉬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이 재해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든 것이다. 자연을 인정하고 같이 공존하면서 숨 쉬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제 필리핀의 모든 게 좋아보이던 시절은 비록 지나갔지만- 나는 또 한번 필리피노들한테 반한다.



어제도 밤새 비가 내렸다.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끄러워 옆 사람의 얘기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다. 화장실 변기는 진작에 수위가 높아졌다. 그래도 시간 지나면 조금씩이나마 물이 꿀렁꿀렁 빠지는 걸 보면 흐뭇하다. 아침에는 갑자기 오랜만에 해가 쨍쨍하더니 이제 한창 뜨거울 점심시간인데 어느 새 다시 구름 색깔이 흐릿흐릿하다. 어쩌면 오늘 오후, 혹은 내일 아침, 또 다를 것 없는 세찬 비가 내리겠지만 예전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은 우리도 지웠다. 대신 조금은 쿨하게 조금은 시크하게 조금은 가벼운 마음을 가졌다.




 

“ 홍수 나서 변기물이 높아지면 좀 기다리지 뭐 ”




이렇게.











 우리 잘 지내고 있어요  :)






고두환 너가 이거 올리자 마자 비 쏟아진다 ㅋㅋ 빨래 어떡해 ㅠㅠㅠㅠㅠㅠㅠㅠ
2008. 12. 3.
안효섭 지붕에 구멍 나면 어째~~~^^;;
2008. 12. 4.
오휘경 화장실 전구를 두개에서 하나로 줄이는 센스!
낙천적인 필리피노 저리가라야 >ㅁ<b
2008. 12. 4.
체리 어쩐지 오늘은 햇빛이 쨍쨍하더라니...
2008. 12. 4.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76-11 | 02-754-7892 | asiaraonatti@gmail.com | 2024 한국 YMCA 전국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