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데서나 잘 먹고 잘 자는 태국팀: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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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009. 6. 23
태국에 온지 벌써 100일이 지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기 40여일의 시간이 남았다.
이 곳에서 몸에 익숙해지고 배운 것 중에 이동식 생활을 통해 하나가 어디가던지 잘 먹고 잘 씻고 잘 잔다는 것…
베이스캠프인… 이제는 정말 집이라고밖에 생각 안 되는 쌈캉펭 YMCA외에도 정말 여러 곳에서 짧게는 1박2일 길게는 한달 정도의 시간을 숙박을 하였다.
아직 남은 기간 또 이동해서 머물러야 할 곳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태국에서 머물렀던 숙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 쌈캉펭 YMCA (3월 5일~8월4일)
우리의 집!!!! 가장 편한 곳~~
처음 치앙마이 공항에 내려서 Y스탭들이 우리를 데려다 준 곳은 바로 이곳 쌈캉펭 YMCA이다. 빈 교실에 있는 책상을 싹 치우고 서랍장과 빨래 바구니, 옷걸이와 침대 메트리스, 이불, 베개… 이런 섬세한 배려까지 해주신 우리의 포근하고 아늑한 숙소이다.
태국팀 10명중 여자 8명은 한방에 4명씩 2층 205호와 206호에서 지내고 있고 남자 2명은 3층 한방을 쓰고 있다.
처음 왔을 때는 나는 사다리 타기로 뽑아서 따완(수진), 마리(민영), 꿀랍(자하)과 한방을 썼는데 4월이 되면서 플로이(서현), 퐈(희진), 마리(민영)와 한방을 쓰고 있다. 그 후에는 귀찮아서 그냥 방 안 바꾸고 쭉 살고 있다.
이곳의 음식은 Y 스탭이신 피멈과 피낭이 오셔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해주시고, 1층 부엌에 세탁기도 있어서 빨래도 쉽게 할 수 있다. 샤워시설은 화장실에서 하는데 벌레가 좀 많고 찬물만 나오긴 하지만 이젠 적응해서 샤워하는데 불편함은 없다. 다만 비가 온 날에는 날개 달리고 징그러운 벌레가 화장실 바닥과 세면대를 뒤덮고 있는 건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Day off를 보내고 있고 저녁이 되면 우리팀끼리만 남아서 각자 혼자 시간을 갖기도 하고 함께 보내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다.
마음도 몸도 이곳에 오면 가장 편한 쌈캉펭 YMCA~! 정말 우리의 ‘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2. 람푼 홈스테이 (3월 16,17일 / 5월 19일~7월3일)
모든 라온아띠 멤버는 5명이 한 팀이 되서 각 나라로 파견되어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태국팀만 람푼팀, 쌈캉펭 팀(지금은 더이따오 팀이지만) 이렇게 두 팀이 와서 10명이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태국에서의 대부분의 생활은 10명이서 한팀처럼 같이 생활하고 있지만, 예외적으로 지역에 들어가는 기간에는 따로 지내고 있다.
우리팀인 람푼팀의 경우는 와타캇 스쿨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고, 더이따오팀은 더이따오 프랭8스쿨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10명 한 명씩 다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는 람푼팀이기에 람푼에서 생활하고 있다.
3월 중순에 홈스테이를 미리 체험해 보는 기간으로 람푼에서 2박, 더이따오에서 2박을 했었다. 람푼 우리 집에 촘푸랑 같이 2박을 했었는데 그 때는 근처 사는 아이들이 자기집인양 마구 놀러 와서 우리랑 놀아달라고 하고 사람들이랑 말도 통하지 않아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고 힘들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5월 중순에 홈스테이 들어와서 계속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현재는 태국에서의 생활이 많이 적응되어서 인지 불편하지 않고 난 오히려 집에 있으면 편하다.
우리 집 가족의 경우는 메(태국어로 엄마), 피웨(언니) , 피겜(삼촌?), 봇(우리애기), 야이(할머니) 이렇게 다섯명이서 살고 있는데 야이와 피겜은 나랑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보통 메가 밥 먹거나 여러가지 많이 챙겨 주시고, 피웨는 날 볼 때마다 옷이나 신발 같이 이것저것 선물을 많이 주신다. 그리고 우리 집 귀염둥이 봇은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엔 내가 불러도 들은채 만채 하더니 지금은 만나면 신나게 잡기 놀이를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내 방은 굉장히 아담한데 큰 침대 메트리스가 방 전체를 차지 하고 있고 조그마한 테이블 하나가 앞에 있다. 그리고 나의 친구 도라에몽 인형도 함께 생활하고 있다. 23년만에 처음으로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되었고, 방에 있으면 가족들이 부르긴 하지만 피곤하다고 하면 터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누워서 음악 듣거나 일기 쓰거나 편지 쓰거나… 그냥 그렇게 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샤워시설의 경우는 무려 뜨거운 물도 나와서 따땃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며, 빨래는 가끔 빨래 통에 넣어놓으면 세탁기에 돌려서 다 마르면 우리 방에 옷걸이에 걸어서 주시는데 언제 빨래를 주실지 몰라서 그냥 맘 편하게 쌈캉펭 YMCA가서 빨고 있다.
5월 중순부터 7월초까지 홈스테이 할 예정이고, 평가회를 빼면 이제 일주일도 홈스테이 기간이 남지 않았다. 주말은 항상 쌈캉펭 Y에 가거나 다른 지역에서 생활을 해서 평일에만 홈스테이를 했었는데, 우리 집 가족들이 정말 좋아서 그리울 것 같다. 남은 기간동안 우리 봇이랑 잘 놀고 메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지내야 겠다.
3. 더이따오 홈스테이 ( 3월 18,19일)
3월 중순에 2박 했었던 더이따오 홈스테이.
난 더이따오 팀의 수은이(모아)와 함께 홈스테이를 했었다.
람푼 지역은 시골 동네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분위기라면 더이따오 지역은 산동네(첩첩 산골은 아님)에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는 않다.
수은이네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 쨍이라는 유치원 아가와 지내고 있는데 애기도 귀엽고…(너무 놀아 달라고 하는게 수은이는 힘들다고 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잘 챙겨주셔서 편했던 것 같다.
4. 도인타논 텐트 (4월 1일,2일)
태국에서 가장 높다는 도인타논.
이 곳에서 우리는 유스리더들과 캠핑을 했었다.
산속에서 이렇게 텐트치고 자고, 캠프파이어 한 것은 처음이라서 마냥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텐트에 2명이 함께 들어가 잠을 잤는데, 제비 뽑기로 라온아띠 한 명과 태국 유스리더 한 명이 짝이 되어 한 텐트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어찌 된게 박촘푸, 김마리(장민영)..이렇게 콘까올리(한국사람) 셋이서 잠을 자게 됐다. 덕분에 밤새 옆 텐트가 시끄러울 정도로 민영이랑 떠들었지만…
이 곳에서 밥은 Y 스탭분들이 신경 써줘서 맛있게 먹었고, 샤워장은 근처 별장 같은 곳에서 편하게 했었다.
밤하늘을 이불삼고, 잔디밭을 요 삼아 잤던 기분… 밤에 산에서 아래를 내려보면서 느낀 자연을 통해 벅참 감동이 있었던 행복한 도인타논 캠핑이었다.
5. 도인타논 카렌족 마을 (4월 3일)
도인타논 텐트에서 2박을 하고 도인타논에서 살고 있는 카렌족 마을에 가서 1박을 했다. 홈스테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건 마을사람 집 한집을 통채로 빌려서 한집은 여자숙소, 한집은 남자숙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텐트를 치고 잤다.
밥은 이번에도 Y스탭들이 해주셨다. 샤워는 화장실에서 했는데 화장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안에 촛불을 키고 했었는데 그리 깨끗하진 않았지만 까올리 쏘까뽁(한국인 더러워)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 그리고 도인타논에서의 잠은 둘 다 침낭에서 잤다.(텐트에서랑 카렌족 마을 집에서 둘다) 사실 침낭에서 잔건 라온아띠 국내 합숙훈련때 양평 가서가 처음이었는데… 이래저래 올해 침낭에서 많이 자게 된 것 같다.
6. Praw 마을 홈스테이 (4월 24일, 25일)
유기농 농산물을 키워 판다는 praw마을.
이 마을에 가서 두 명씩 짝을 지어 홈스테이를 했다.
이번 파트너는 따완(구수진)이었다.
이 마을에서의 기억은 더운 것밖에 없다.
태국은 4월에서 5월초가 건기라 정말 더운데, 이 더위는 살인적이라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햇볕에 몸이 녹아 내릴 지경이다. 쏭크란이 4월중순에 하는데 왜 그때 송크란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쏭크란을 하면 신나게 물을 뿌리고 맞다 보면 더위를 잊고 오히려 추울 정도니깐…
홈스테이 기간에 잠시 농산물 수확 및 포장 도와 드리고 새벽시장 열리는 곳 따라가서 장사 조금 도와 드린 정도… 그냥 그럭저럭 이 때부터 홈스테이 및 짐싸기에 달인이 된 것 같다.
7. 치앙라이 Y호텔 (5월 10일 ~ 14일)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중에 최고급 이었다.
무려 호텔이었으니깐…
오랜만에 누워보는 폭신폭신한 침대 메트리스, 하얀 시트와 이불, 그리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그리고 맛있는 식사까지!!!
치앙라이에 있었던 기간은 HIV마을 방문, VISA연장하러 미얀마 국경 방문, 댐 만들기 작업등 짧은 기간에 많은걸 경험하고 배운 시간이었고 아무리 힘든 일정 속에서도 숙소가 좋아서 몸과 마음이 편했다.
처음으로 쌈캉펭Y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자발적 가난, 자발적 불편함을 겪으러 왔다고 하지만….
역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편한 것 익숙한 것이 좋은가 보다.
8. 더이따오 프랭8스쿨(6월 5일,6일)
‘Y volunteer for EARTH ‘camp를 하기 위해 유스리더들과 함께 더이따오 프랭8스쿨에 모였다. 프랭8스쿨의 도서관을 정리하고 페인트칠 및 벽화를 그리는 작업이었는데 람푼팀도 더이따오팀과 함께 했다.
오랜만에 간 더이따오였고, 당연히 3월 달에 왔던 홈스테이 집에서 잘 줄 알았는데 유스리더들과 함께 학교 교실에서 자게 됐다.
타이유스리더 아이들과 라온아띠는 다른 교실을 썼는데, 모기장도 쳐 주시고 침낭 속에서 잤다. 이제 침낭이 더 이상 낯설지 않는다.
9. 메홍손 지역 홈스테이 (6월 13일~15일)
원래는 없던 스케쥴 이었는데 우리의 요청과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아져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된 메홍손.
도인타논에서도 봤었던 카렌족이 사는 마을에 방문하게 됐다.
태어나서 이렇게 길이 험하고, 첩첩 산골은 처음 가봤다. 치앙마이 쌈캉펭 Y에서 메홍손 시내까지 차로 3시간(이 길도 중간에 구불구불해서 편한 길은 아니었다.) 그리고 바퀴가 큰 썽태우를 타고 3시간 정도 가서 도착한 마을. 썽태우 타고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에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어떻게 올라가나 싶을 정도로 험하고 멀었다.
이 곳에서도 홈스테이를 했는데, 이번엔 2인 한집이 아닌 one by one 한명 씩 한집에 들어가게 됐다.
나는 찐따나라는 13살짜리 소녀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방 한 개를 빌려줘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갔던 숙소 중에 환경은 최악이었다. 물도 빗물을 받아서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석회가루가 섞여서 뿌연색이었고, 밤에는 불 안 들어 오는 집도 많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서 저녁8시만 되면 밖은 달빛만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씻을 때도 우리 집 화장실은 불이 안 들어와서 어둡고 냄새 나는 화장실에서 석회물로 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곳 저곳 홈스테이하고, 여기저기에서 자는 거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밤이 빨리 찾아와서 다른 곳에 있을 때보다 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지만…
태국에 살지만 태국인이 아닌 소수민족.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닮은 카렌족. 그들은 첩첩 산골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그곳이 편해서 사는 걸까. 아니면 갈 곳이 없어서 계속 그곳에서 머물 수 밖에 없는 걸까.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가진 것이 없어서 웃고 떠들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람들의 행복이 과연 어떤 색인가 생각해보게 되는 홈스테이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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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는 3달반동안 9곳의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덕분에 이젠 어디 간다고 하면 짐도 몇 분이면 금방 싸고 자는 것도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어디 가서든 적응을 잘 하게 되었다.
7월초에 일주일정도 휴가를 받아서 여행을 가게 됐는데, 아무리 싸고 질 나쁜숙소에 들어가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내가 태국에 와서 무엇을 배웠나.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를 생각하곤 한다. 그게 무엇이라고는 아직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순 없지만, 이렇게 태국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고 생활할 수 있는 나와 우리팀원들을 보면 많이 성장하게 적응 한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남은 한달 반 동안의 태국에서의 기간도 태국을 좀 더 배우고 적응하면서 지내고 싶다.
아픔 속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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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009. 7. 3람푼에서의 생활이 내일이면 작별을 한다.
학교에 오면 ‘피차엠~’ 하면서 나를 부르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재밌고 친절하신 선생님들을 만나는 것도, 날 항상 보살펴 주시는 호스트패밀리와 함께 지내는 시간도, 우리의 ‘능썽쌈’하면서 펀치를 날렸던 무에타이 도장도, ‘히우카우’(배고파요) 하면서 양쁠라 두부 먹었던 식당도… 그 외 익숙한 람푼의 풍경들이 오늘 마지막 밤을 보내면 내일 다시 쌈캉펭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에 이 곳에 왔을 때 막막했었다.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할지, 어떻게 가족들을 대해야 할지…
아이들은 우리가 뭐가 좋은지, 피 까올리~(한국인), 혹은 우리의 태국이름을 부르면서 매일 쫓아 다녔다.
우리를 좋아해주고 받아 준 아이들이 예뻤던 것도 잠시… 우리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우리를 점점 지쳐가게 만들었다.
아이들과 노는 대신 우리는 교장실에 앉아서 책을읽고, 다이어리를 쓰고, 컴퓨터를 하고, 편지를 쓰는 등 각자 자기 할일을 하며 학교에서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실, 태국은 이미 생활 기반이 잘 갖춰져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해외자원봉사의 개념은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같이 더러워지고 같이 아파 하는 숭고한 희생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태국에서의 자원봉사의 개념은 너무 달랐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활동을 찾기 보다는 YMCA에서 끌고 다니는 데로 따라 다녔고, 갑자기 스케쥴이 바껴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네들 스타일에 맞추기를 요구하면서 보고서가 튕긴적도 있었다.
스케쥴은 유동적이었고,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잠깐씩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을 짜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보다는 항상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다시 만나요’ 등의 짧은 인삿말들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고, 꼬리잡기, 말전달하기 게임, 나따라해봐요, 개구리송, 곰세마리 등 매일 비슷한 패턴의 수업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만 보면 ‘땐 노바디~(노바디 춰주세요)’하는 사람들 속에서 작년 노바디 열풍때도 추지 않았던 노바디를 연습해서 사람들앞에서 춤을 췄다.
이 곳 생활을 하다 보면 말도 통하지 않고, 여기서 시키는 일조차 잘하는지 모르겠고, 스스로 무언가 찾아서 이곳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데 찾기 힘들었고, 모든게 다 제대로 되지 않는것 같아서 태국에 왜 왔는지에 대해 괴리감이 심했다.
그러나 태국에서의 생활도 엄연한 자원봉사였다.
며칠전에 중간평가를 하기 위해 송실장님과 인천 Y간사님께서 왔다 가셨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송실장님께 자원봉사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자원봉사는 바로 성과물이 보이는 일은 아니지만, 강요 받는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아서 즐거운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서로 행복해지는 모습을 서서히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항상 끌려 다녔고, 여기서 시키는 일 외에는 제대로 한 것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송실장님은 해외봉사의 경우 그 나라에 따라 자원활동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셨다. 태국같이 기반이 잘 갖춰진 나라는 동티모르처럼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하는 일대신 이 곳 사람들이 노바디를 춰달라고 하면 추는 것이 맞는 거라고 하셨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 뿐만 아니라, 중상층을 위한 복지도 필요한 것이고 피비랜내 나는 전쟁터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 만이 숭고한 자원봉사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자원봉사 하면 절대 빈곤,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등이 먼저 떠오르는 고정관념을 갖고있는 나로서는 이미 기반이 잘 갖춰저 있는 태국이기 때문에 람푼에 와서도 우리가 과연 필요한 존재일지에 대해 회의감이 많이 들었었다.
처음에 나온 수업 시간표는 우리가 일주일에 8시간정도 아이들과 수업할 수 있는 시간이 할당되어 있었다. 그러나 3주차 쯤 되었을 때, 방콕에서 학교 평가를 오셔서 아이들은 우리들과의 수업대신 시험공부에 더 매진을 해야 했고, 우리들을 일주일에 한번 세 시간 몰아서 하는 수업시간 밖에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 적은 수업 시간 조차도 매번 변동되는 YMCA 일정 때문에 지역활동 하다가 다른 곳에 갔다가 오면서 취소 되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수업했다고 하는 시간은 다섯손가락도 넘지 못한다.
이래선 우리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시간떼우기 아닌가… 그리고 아이들한테 대체 뭘 가르쳐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답답했다.
그러다 내가 찾은 해답은 – 정답이라고 는 확신할 수 없지만 – 무언가를 제대로 해야 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기 보다는 이대로 물같이 흘러가는 스케쥴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한달 반정도밖에 안되는 기간에 한국어를 아무리 체계적으로 가르친다 해도 아이들이 얼마나 기억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난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2년동안 수업 들었던 중국어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매일 붙잡고 있는 영어도 잘하지 못한다.
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내 오만한 생각일 뿐이었다. 먼 한국에서 건너온 우리를 보며 신기하고 반가워 하는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거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송실장님이 왔다 가면서 람푼지역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Y에서 왜 람푼과 더이따오를 활동지역으로 선택했는지 생각해 본 사람있냐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더이따오의 경우는 댐건설을 하면서 원래 있던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킨 마을이고 삼모작에서 이모작 혹은 일모작밖에 할 수 없는 지역으로 오게된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상을 해주지 않아 10년전에 농민운동으로 피비랜내 나는 지역이었다고 하였다. 왜 산골 마을에 있는 집들이 새 집 처럼 깔끔하고, 길이 반뜻하게 닦여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냐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람푼의 경우는 원래 농촌마을이었는데 큰 공단을 들어서면서 갑자기 이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원주민가 이주민간의 마찰이 생기면서 마을 환경이 급격히 변해 지역사회가 혼란스럽다고 하셨다.
항상 웃고 있고, 우리들에게 항상 호의적이었던 더이따오와 람푼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그런 아픔이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역활동을 시작할때쯤 팀내부의 문제, 현지 스탭들과의 마찰, 일에대한 스트레스 등 여러가지가 겹쳐서 하루하루 이겨냈고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로 대하기 보다는 피곤하다고 피해버린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이 곳에 내가 왜 왔는지 생각하기 보다는 하루하루 버티는것도 힘든 날도 많았다.
한 달 좀 넘는 시간동안 내가 이 곳 람푼에 와타캇 스쿨에서 지낸 게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깜짝 이벤트 일지도 모른다. 그 깜짝 이벤트가 이들을 즐겁게 했기에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 지나친 관심을 표했고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그 호의를 감당하기 힘든적도 있었지만 우리의 존재를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은점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겉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혼란한 시간을 겪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즐거움이 되고 희망이 되었길 염치 없이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람푼지역에서 우리를 받아준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을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귀여운 덱덱(아이들), 쿤 크루(선생님), 크럽쿠르아 컹 찬(나의 가족) 모두 보고싶을 것이다.
다시 내가 이 곳에 올 수 있을까? 아니 이곳에 오고 싶어 할까? 확실한건 이 곳을 그리워 하긴 할 것이다.
모두 컵쿤막막카. 싸와디카. 촉디나카.
(정말 고마워요 안녕히 계세요, 행운을 빌여요)
4개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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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이상하게도 이 곳은 선뜻 글을 쓰기가 꺼려진다. 비겁하게 변명을 하자면, 원래 글 솜씨가 없는 탓, 다른 라온아띠들의 글을 읽고 기가 죽은 탓, 스리랑카에 온 후로 컴퓨터와 TV와는 완전 작별을 한 탓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곳에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 시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4개월이 지났고,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미 한달 전부터 귀국 비행기를 탈 생각을 하면 눈물이 글썽여질만큼 이곳에 정들어버렸다.어떻게 남은 한 달을 보내야 할 지, 한 달 동안 무얼 해야 할 지 정말 모르겠다. 멍청하게도 가는 시간만을 아쉬워하면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스리랑카에 4개월을 있었지만, 만약에 사람들이 나에게 스리랑카에 대해 묻는다면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 같다. 오직 짧은 내 시야로만 본 것들이 스리랑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들은 이렇다, 여기 문화는 어떻다라고 단정지어 말을 하기가 겁이난다. 내가 스리랑카의 모든 사람을 만나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모든 일을 체험해 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겪은 스리랑카는 친자식같이 우리를 챙겨주는 YMCA 사람들이 있는 곳, 이제는 우리와 허물없이 친해져버려 똥얘기도 스스럼 없이 하는, 그렇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정말 슬퍼하면서 어떻게 우리를 공항까지 마중나가야 할 지 모르겠다는 코디네이터가 있는 곳, 매일 지나다니는 시장에서 우리를 볼 때마다 공짜로 망고를 건네주는 인심좋은 아저씨가 있는 곳, 일과를 마치고 10분만 걸어나가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5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집에서 한 솥 밥을 먹고 서로 부대끼며 지낸 4개월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난, 이 곳에 좋은 친구가 되어주러 왔지만, 오히려 이들이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난 나누기 보다 받기만 한 것 같다.
저도 잠깐공간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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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요세들어서 많이 생각납니다치열한 한국사회는 너무 힘들군요 ㅠㅠ 스리랑카의 5개월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걱정은 안했을텐데..고민이라도 사람이라든지 때문에하는 건전한 고민이었다고 생각했는데한국에돌아오니 모든게 걱정이네요.. 취업이니 군대니 돈이니..ㅎㅎ돌아온지 벌써 반년이나지냇는데 너무 그립네요.. 달카레가 ㅋㅋㅋ 2기분들 사진보니깐 이제다들.. 스리랑카인하셔도되겠어요~ ㅎㅎ 이제 2기도 얼마안남았네요 남은시간동안 퐈이팅하시고다들보고싶다고 전해주세요 ㅋㅋㅋ
Berita Malaysia #7 입니다.
99+
벌써 7번째네요.즐거운 하루되세요.
또 한번 글을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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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ODA에 관해서 제가 많이 끌리는 것이 있나 봅니다.일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그에 관련된 자료를 읽어 오기 시작했는데요.읽다 보니까 인권에 기반한 개발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게 되었어요.아직 지식이 짧아서 정확히 뭘 뜻하는지 잘 모르겠어요.네이버네 검색해서 확실히 뭔 뜻인지 알아 볼까도 했는데 자료 천천히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마음로 쌓이는게 있다면 그게 인권에 기반한 개발의 방향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이 단어나 나온 만큼 그에 관한 활동을 많이 할테고 그걸 읽는 전 그것 천천히 알아 가겠죠.하지만...요즘 전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전통에 기반한 개발은 없을까?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에도 교육을 받았고 예전 부터 많이 들어 왔잖아요.전통. 그거 사람이 사는 환경 마다 다르지 않나요?그 이유는 사는 환경이 다르니까.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른 이유는 사는 환경이 다르니까.전통문화라는거요. 그 나라 사람이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결정체가 아닐까요? 자연과의 조화 과정에서 전통문화가 나오고 정신적가치가 나오고. 전 그렇게 생각 했거든요. 그래서 개발을 한다는 것도 이것을 많은 부분에서 고려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그래서 교육을 해도 그 전통문화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내의 전통을 하고 지금까지의 조상이 살아온 생활 방식과 그 이유. 자연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지. 그러한 것들을 알고 고려 한다면, 세계적인 흐름 신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아 무지막한 개발을 하더라고 좀 고려를 하고 개발 하지 않을까요? 그럼 개발 과정 중 무식하게 많은 문제를 낳는 환경 문제도 좀 줄어 들거라고 생각하는데요.이번에 메콩 강을 좀 가려고 해요. 이번에 메콩에만 11개의 댐이 건설 된다죠?문제는 메콩 강에 그 댐이 건설 되는 순간 부터 메콩 강의 전통문화를 사라질 거란 거죠. 물의 흐름이 달라 지고 물고기와 동식물이 사는 환경이 급 속도로 변한게 뻔한데 그 전의 환경에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모든 것들이 변하는 건 당연한 거겠죠.전 그 전에 어떤 전통문화를 이루며 메콩강 사람들이 살아 왔는지를 보고 싶어요. 그래서 거대한 농경지도 모고 싶고, 메콩 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네요.아프리카 얘기도 좀 하고 싶어요.요즘 아프리카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요. 대륙 중 가장 오랜 된 대륙에 비해서 그리고 많은 인구 수에 비해서 그 대륙의 전통은 많이 사라진 것 같더라구요. 그런 곳에 사람들은 개발이라고 교육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물을 길러다 주고 의료 사업을 하는 것을 자료를 통해 많이 보게 되었어요.태권도를 배워서 뭘 할까요? 잠깐의 이벤트 아니면 그냥 한국문화 소개? 물은... 깨끗한 물을 먹는 것을 좋을 거에요. 그 만큼 아이들은 깨끗한 물을 통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으니까요. 특히나 면혁력이 없는 아이들이니까. 그런데 잠깐 깨끗한 물을 공급 받고 다시 더러운 물을 먹어야 한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이중 고통이죠. 그 나라 환경이 어쩔 수 없이 더러운 물(이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시선이겠죠.)을 먹을 수 밖에 없다면, 그 사람들은 이미 그 물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뭐 평생을 깨끗한 물로 정화해서 준다면 좋겠지만, 그런거 아니라면 괜한 생각 접는 게 좋지 않을까란 생각 했어요.약? 비슷 할거 같아요. 에이즈가 특히나 많다고 들었어요. 약도 없는데 어떻게 생활 할까요. 이건 전통 약으로도 안되는 거고. 그 외의 다른 방법이 많겠죠. 물과 같은 거 같아요. 평생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거 아니라면 차라리 전통의 방식으로 예를 들어 그 나라의 약초로 치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더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정보 교육 이라던가 철도나 도로 이러한 것들을 통해 이동성을 높힌 다거나. 모두다 필요 할거라고 생각 되요. 하지만 이게 그 사람들에게도 정말 필요 할지가 의문이에요. 정보의 격차. 옛날에는 그런거 없이 잘 살았던 거 같은데. 뭐 지금 개발이 되서 꼭 필요 하지만. 그 옛날 정말 사람들이 욕심 없이 서로 상부상조 하고 물물교환하고 개인 자산에 대해 욕심이 없었을 때는 그런거 필요 없었을 텐데. 지금은 생활이 그렇지 않죠. 하지만 아직도 그러한 곳이 존재 하잖아요. 그러한 곳 까지 굳이 컴퓨터 갖다 놓고 도로 깔 필요는 없을 거 같아여.도로... 철도.. 이러한 것들이 깔리면서 많은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있죠. 땅은 숨쉴 수가 없어지고 매일 같이 지속 되는 소음과 사고들. 이동을 빨리 하다 보니 그 외의 많은 문제점들이 더 발생이 되죠.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더 발전을 해야 하니 더 많은 환경 파괴와 문제가 생기고 이건 계속 이어질거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짧은 지식으로 더 깊은 생각을 못 쓰겠네요. 베트남은요. 물이 엄청 드러워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보니 오토바이 세차도 하고 세재가 나오다 보니 세재도 쓰는데 문제는 정화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도 모든 폐수가 강으로 흘러 들어가니 물은 더러워 질 수 밖에요. 쓰레기 국물도 그냥 하수로 버리고 그 것들은 하수를 따라 강으로 흘러 들어 가죠. 이게 몇년 계속 지속 되다 보니 더러울 수 밖에요. 베트남은 비닐을 많이 써요. 작은 물건 사도 비닐을 주고 장난 아니에요. 문제는 그 비닐이 잘 안썩으니까 문제죠. 쓰레기 통은요. 모두 구멍이 뻥뻥 크게 뚫려 있어요. 이유는 잘 모르 지만, 비 때문이 아닌가 해요. 비나 많이 오니까 그 빗물이 빠져 나가도록 만들어 진게 아닌가 하는거죠. 문제는 이 쓰레기 통이 쓰레기 통의 역할을 잘 못하는 것 같다는 거죠. 쓰레기 통해 쓰레기를 넣어도 그냥 바람에 다 날라가고, 사람들도 쓰레기통에 안버리고 길바닥에 그냥 버리는 것도 많아요. 옛날에 음식물 쓰레기야 과일 같은 거 먹고 길바닥에 버려도 동식물의 거름으로 잘 순환 되었을 테지만, 요즘은 도로위에 그런 것들을 버리고 또 비닐이나, 플라스틱이 많으니 많은 부분에서 순환의 흐름이 끊겼죠. 아 ! 그거 아나요? 종이는 썩으면서 메탄가스를 발생시키는데 그게 이산화탄소의 20배라고 하네요. 종이. 한국도 마찬가진데 참 많이 쓰고 버리죠. 세재를 들어 오지 말고 그냥 쌀뜬물로 여러번 씻어서 충분히 그릇은 깨끗한데, 오토바이는 아무리 경제 발전이 급해서 많은 부분에서 필요 성이 급증했다고 하지만 그러면 그 뒤에 이러질 문제점들(공기오염 및 기름이나 세차 등으로 발생되는 오염들)을 대비 해두지. 쓰레기통은 수거의 용이와 비 때문인지가 확실한지 모르지만, 좀 더 실용적으로 쓸고 비닐 보다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거나 아니면 쓰레기 통을 개량 하면 좋았을 껄. 아무대나 쓰레기 좀 버리지 말지. 다 수거 하기 힘들어 져서 결국 땅에 묶히면 다 환경 오염이 될텐데. 베트남은 전통문화를 잘 아는 나라인것 같아요. 어린 아이들도 전통 노래 춤을 잘 따라 하고 어릴 때부터 잘 가르치는 것 처럼 보이거든요. 하지만 점차 경제적인 면에서 시장을 개방하다 보니까 그 전통 문화와 시장경제의 이념에서 많은 부분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아마도 과도기 단계겠죠. 음... 우리나라는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많은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은 많이 사라졌다는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베트남은 전통이 살아 있어요. 도시는 많이 오염 되었지만, 아직 시골은 그렇지 않으니까. 아직 지금 베트남이 갖도 있는 여러 문제점을 전통에서 해결 할 방법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베트남 전통을 잘 몰라서 뭐 깊은 말을 잘 못쓰지만, 그것을 알기 위해 메콩강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게 한국에서 한국의 문화를 알아가는 길로이어 졌으면 좋겠네요. 이젠 저도 우리가 어떻게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 왔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졌으니까요. 우리의 문제점들도 분명 그 속에서 해결할 방법들이 있겠죠.
동티모르에서 온 편지 - 단상(斷想) 3(4시까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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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에서 온 편지 - 단상(斷想) 3
09년 6월 15일
제목 : 4시까지 와!
- 나는 이 곳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 ‘테라산타’마을에 위치한 YMCA 센터에서 팀원들과 함께 일주일에 세 번 영어를 핑계?로 아이들과 만나고 있다.
우리의 미숙함 인지 처음에는 교실을 꽉 채운 아이들이 하나 둘 안 보이더니 어제는 센터에 있는 아이들은 둘 뿐인 것이다. 아이에게 “친구들은 어디 있니?”하고 물으니 대답 대신 친구들을 데리러 다녀 온 단다. 옆에 있던 친구도 같이 간단다. 나는 좋다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답게? 4시에 수업이 시작하니 늦지 말고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 사이 안 보이던 아이들 몇몇이 왔고, 4시에 예정된 수업은 시작됐다. 나는 수업 준비로 보낸 아이들의 존재를 까마득히 잃어 버렸다. 한 시간 수업의 반이 지났을 쯤 아이들은 약속을 지켰고, 친구를 데리고 왔다.
이런 .... ㅠㅠ;
하지만 나는 우리가 교실 안의 또 다른 아이들과 정한 규칙이 있는 지라 아이들에게 교실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 하지 않았다.
나는 지극히 내가 가진 시간의 개념과 상식의 잣대를 아이들에게 들이 밀었고 끝끝내 고수하였다.
아이에게 많이 미안했고, 자책감도 들었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와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나는 무엇을 아이들과 함께 한다고 하고 있는 것 인가? 그들은 이해하겠다고 상대적인 사고를 하겠다고 무수히 기억하고 다짐하지만 난 여전히 순간순간 너무나 단순하게 그들에 아픈 상처를 주는 것 같다. 단순한 실수라고 치부하며 너무 쉽게 하고 있다.